행복이란
구약성경에는 “행복”('ashre)이라는 말이 46회 나오는데 그 중에 26회가 시편에서 발견된다. 시편에 나오는행복을 한 번 더듬어보기로 하자. 우리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시편 저자들이 생각한 행복이 얼마나 같은지 또는 다른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5복이라고 해서 수(壽) 부(富) 귀(貴) 다남자(多男子) 고종명(考終命)을 곱지만, 히브리인들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저자들이 말하
는 행복한 자는 다음과 같다
A. 우선은 행복한 개인을 지적한 것이 있다.
(1) 악한 자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 그리고 야웨의 율법을 즐기고 그의 법도를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1-2).
(2) 죄 용서함을 받은 자(32:1). (3) 하나님 안에 도피한 자(34:8). (4) 야웨를 신뢰하는 자(40:4;84:12). (5)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자(41:1).
(6)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성전에서 살게 하시는 자(65:4). (7)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자(94:12). (8) 야웨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기는 자(112:1). (9) 전통(箭筒)에 가득한 화살처럼 자식을 가진 자(127:5). (10)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아주는 자(137:8). (11)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줄자(137:9). (12) 야곱의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146:5)
B. 다음은 행복한 집단(복수)이 누군가를 말한다.
(1) 하나님께 피난한 사람들(2:12). (2)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84:4). (3) 하나님 안에서 힘을얻는 자들(84:5). (4) 축제의 고함소리를
아는 자들(89;15). (5) 정의를 행하는 자들(106:3). (6) 행위에 있어서 흠 없는 자들(119:1). (7)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자들(119:2).
(8)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들(128:1,2). (9) (하나님의)축복이 임하는 자들(144:15 a). (10) 야웨를 하나님으로 모신 자들(144:15b).
C. 나라를 단위로 한 것.
(1) 야웨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33:12).
위의 경우들을 종합해 보면, 행복이란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과의 역동적인 관계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특히 야웨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 하나
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자, 하나님의 법도를 올바로 지키며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는 자, 하나님을 두려
워하며 그를 모시는 자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바라
는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가지 길
시편 1:1-6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사는데, 그것을 인생행로(行路)라고 생각해 보자. 인생은 나그네 길, 일생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옳은길을 걷다가 영생에 들어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불의의 길을 가다가 마침내 멸망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다. 전자를 우리는 슬기로운 자라고 말하고,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시편 1 편 저자는 인간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했는데, 대 전제는 야웨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은 그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그리고 인간이 자기의 주인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물주이신 야웨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가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 전제를 결코 무시할 도리가 없다.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우선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하면서 산다. 세상을 살아 갈 때, 우리 이웃 가운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법도를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인은 그들을 악한 자, 죄인, 냉소자(무신론자)라고 부르고 있다. 슬기로운 자는, 우선 소극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의 꾀를 쫓거나, 그들의 길을 같이 걷거나, 그들과 동조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야웨의 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하나님의 법도를 명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째서냐 하면, 비유컨대, 그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요단강을 제외한 모든 하천이
건천(乾川= Wadi)이어서,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보통 때는 하상(河床)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시냇가에 나무와 물 없는 건천(乾川) 가에
심은 나무는 그 운명이 매우 다르다. 시냇가의 나무는 언제나 잎이 무성하며 마르지 않으며 열매를 잘 맺는다. 그처럼 슬기로운 자는 만사형통하며 하는 일마다 번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야웨 하나님께서 늘 지켜주신다. 그 이상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자행자지 하는 사람은,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으며, 열매가 없으니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창피를 당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결국은 의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의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으며, 드디어 멸망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확연한 귀결이다. 하나님과 그의 법을 알고, 믿고, 실행하는 자의
길은 행복과 영생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사람의 길은 멸망에 로 귀결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
시편 9-10편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능력을 믿는다. 그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붙드시고, 생존케 하시고, 그의 목적을 향하여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 가운데, 자유의지를 가진 것들은 그들의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법을 어기는 행동을 자행한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진리와 질서와 법의 하나님으로서, 만물은 하나님의 자연 질서대로 운영되도록 만드셨고, 따라서, 창조 이래 만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복종하며, 아름다움과 평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지니고 창조된 고등한 존재들, 곧 천사와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법과 질서를 어기고 자기의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세상의 질서를 교란하여 추하고 더럽고 어지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한 법을 어기는 동시에,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의 법을 어기고, 서로 미워하며, 원수를 맺으며, 살생하며 살고 있다. 그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결국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진리 앞에서, 우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범죄 한 상태에 있는 것이고, 다음은 하나님의 은총의 소치로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과 그의 법과 질서를 계시하심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그 계시를 믿고 따르려고 하는가 하면,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 행동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윤곽 속에서 볼 때,시편 9-10장의 저자인 시인은 계시의 하나님 곧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법도를 따르려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반면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법과 질서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웃을 불법적으로 괴롭히고,공격하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가진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불법자들의 까닭 없는 행패와 공격과 난동을 겪으면서, 초월자 곧 자기와 원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집중하고 그의 판단과 처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야웨이신 하나님 곧 만물의 주님이신 분을 바라보면서, 그의 공포와 불안과 염려의 심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그의 입에서는 찬미가 솟아나온다. 그만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에, 제 아무리 원수들이 날뛰어도 그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법을 어기는 자는 벌하시고 망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법과 질서를 따르는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간 역사 특히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너무도 확실한 것이기에, 시인은 그 능력과 공의 하나님을 찬미한 것이다. 지금 억압을 당하고 억울한 지경에 있는 무력한 인간을 그 하나님은 결코 버려두시거나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자기도 그런 처지에 있기에, 그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와, 그를 믿는 연약한 자들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는데도
시편 11:1-7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믿고 그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피난처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을 가리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며, 자기들의 힘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안절부절못하고 혹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특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들 나름의 판단을 가지고 충고를 한다.
세상적인 논리와 상식을 가지고 충고를 한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더러 어서 도망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고난이 있으니까 저기로, 저 산꼭대기로, 새처럼 날아서 도망을 치라는 것이다. 원수들에게 포위되었고, 화살을 시위에 얹고 쏘아대려는 절박한 찰나에 있는 나에게, 어서 날아서 저 높은 곳으로 달아나라는 것인데,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고, 동정어린 충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더러 말한다. “네가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고난은 여전하고 절박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원칙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어서 달아나야 한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 마음 약한 성도들은 그럴 사 해서, 인간의 수단을 다 써서 그럴듯한 피난처를 찾아간다. 돈과 권력과 수단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시편 11 편 저자는 그런 충고에 끌려가지 않았다.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야웨 하나님이 주님이시고 임금이시라는 신념으로 투철하였다. 창조주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그의 거처에 엄조하시며, 하늘 보좌에 임금으로 군림하여 계신다. 산으로 도망을 치는 것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로 올라가서 그를 피난처로 삼아야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의 권력자요, 능력자일 뿐 아니라, 최고의 심판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지들의 그릇된 잣대를 가지고 그릇되게 판단을 하지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만사를 바르게 보고 판단하시며, 누가 의롭고 누가 악하다는 것을 확실히 아실 뿐 아니라, 응분의 보응을 하시는 분이시다.
시인은 말한다. 야웨는 의인과 악인을 시험하시고, 그의 영이 폭행을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악한 자에게 숯불과 유황불을 내리실 것이며, 뜨거운 바람으로 심판하시리라.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다른 모든 사람과 꼭 같이 풍랑과 시험을 당하지만, 그리고 들려오는 많은 그럴 사 한 충고와 가르침이 있지만, 의로우신 야웨, 의로운 행동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도피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시인은 ”올바른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단언을 가기도 그의 시를 마무리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감언이설이 우리를 유혹하여도, 우리는 오직 주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의 눈에 광명을 주소서
시편 13 편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당장에 낙원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신앙생활을 깊이 하면 할수록 그 신앙인에게 더 많은 시험과 환난이 닥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때로 큰 시험을 주시고 연단을 하신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종종 믿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경우도 있다. 시편 13 편 저자는 역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환난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원수들의 끈질긴 공격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환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에게 매달리는 것은 그의 믿음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도 그는 원망조로 하나님께 탄원을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를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얼마나 오래 동안 당신의 낯을 나에게서 돌리시렵니까?”하고 불평을 터뜨렸다. 하나님에게 배척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시련이 심하고 또는 오랠 때가 있다.
심신이 아프고 슬픔이 엄습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또는 원수가 그리고 악의 세력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모든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나와서, 그에게 매달려 호소를 한다. 그는 야웨가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실 분, 또는 그것이 가능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기에, 더욱더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그에게 부르짖는다. 아마도 너무도 울어서 눈이 안 보일 정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의심의 안개가 앞을 가로 막았을 수도 있다. 울다 울다 지쳐서 잠들어 버린 젖먹이 아기처럼, 시인은 지쳐서 더 기도할 힘이 없을 정도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자기 눈에 광명을 달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을 똑 바로 보고. 희미해지려는 판단력을 되살려 정로만을 걷기 위해서, 하나님의 광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다보니 그의 신앙은 더욱 튼튼해지고 더 또렷해졌다.
하나님의 꾸준한 사랑(헤세드= steadfast love) 을 깨닫고 그것을 의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를 결코 놓치거나 방치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이 시인은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야웨를 노래하겠다는 다짐까지 한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광명을 달라고 부르짖는 음성을 결코 물리치시지 않으실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망언
시편 14 편
인간의 자연적인 생래적 눈을 가지고 볼 때 표면적인 삼라만상이 보인다. 과학이 발달하고 특히 자연과학이 발전하여 더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우주 망원경이나 전자 현미경으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로시아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은 스푸투닉 우주선을 타고 지구 외기권을 돌면서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은 안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시 한 복판에 가가린을 칭송하는 거대한 스테인레스 상이 서 있다. 시편 14 편 저자는 말한다. 마음이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한다고.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셨다(마 5:8). 인간의 눈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정상적이 아니고, 흐려지고 어두워지고 병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인간의 타락상을 묘사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썩었다”는 것이다. 썩은 눈, 썩은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썩은 인간이 하는 짓은 구역질나는 일, 가증한 일들이다.
하나님 아닌 우상에게 절을 하고, 동료 인간을 미워하고 죽이고 대량 학살을 하는 등 끔찍한 일을 자행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제 아무리 자기가 잘나고 자기가 제일이라고 슬기로운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이탈하여 곁길을 가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태양이 하늘에 엄연히 떠 있어도 구름이 가리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눈이 멀면 엄연히 앞에 서 있는 부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하나님은 의인들과 같이 계신다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 하고 모두가 어리석다. 그러나 아니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고, 따라서 그를 알고 또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게 보아주신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는 선택된 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앞에 놓고 시인은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더 잘 사는 것 같고, 의인들이 더 가난하고 못 사는 것 같지만, 사필귀정, 어리석은 자들은 큰 곤란과 공포 속에 빠질 것이고, 의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행복에로 초대를 받고, 그와 더불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 중 어느 누가 스스로 의롭다고 할 자가 있는가?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 주시고 믿게 해 주신 하나님,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 어전에서 살 자가 누구인가?
시편 15 편
우리의 이상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행복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함께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 가운데 와 계시기로 약속하시고,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짓고 언제나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게 예배하는 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무소부재의 하나님은 그가 존재하시는 그 어디든지 다 그의 집이시다. 계시록에 의하면 이상적인 세계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계 21:22).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이나 그 어디에나 하나님은 계시고,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나 그 어느 때에나 하나님을 우리과 같이 계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그 앞에서 살 수 있는 우리들의 자격이 문제이다. 누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가 말이다.
시편 15편 저자는 야웨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선민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이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 읽고 보라고 시를 쓰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 강령을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적어도 이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열 가지 조항을 제시했다.
물론 십계명이 있고 기타 많은 법들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것들을 뽑아서 제시한 것이다. (1) 흠할 것 없이 행동하라. (2) 옳은 일을 하라. (3)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을 말하라. (4)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라. (5) 친구들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 (6) 이웃을 모욕하지 말라. (7) 악한 자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존경하라. (8) 맹세한 것은 자기에게 해가 되더라도 지키라. (9) 이자놀이를 하지 말라. (10) 무죄한 자를 해치는 뇌물을 받지 말라.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말하는 우리들이지만, 과연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이 시인이 지적한 것과 얼마나 부합한가 말이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앞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에, 그런 사람답게,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을 시인이 말한 조건들과 견주어 반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안전한 피난처 .
시편 16편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해(苦海)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전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때로는 질병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며 위협한다. 때로는 불의의 재난이 우리에게 재난을 가져다준다. 때로는 나의 실수와 어리석음이 나를 어려움 속에 빠뜨린다.
때로는 나의 원수, 나의 대적이 나를 괴롭히고, 궁지로 몰아넣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만들어, 전전긍긍하며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다 인가? 그렇게 덧없는 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비관적인 눈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슬픔과 절망과 한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존자가 아니다. 창조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가 주신 생명을 받아 가지고 살고 있으며, 그가 공급하시는 모든 필수품(공기, 물, 빛, 음식 등) 때문에 생존하는 의존적인 존재이다.
우리 자신의 꾀와 힘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 생존의 기본적인 생필품을 공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데, 많은 경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그 크신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그에게 나오고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품어주시고 안전과 평안을 주시려는 뜻을 가지시고 기다리신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이 그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혼자서 고아인 양 떨고 있으며 절망하고 있다.
가장 큰 축복은 그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여 보여주시고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실 때, 그를 만나고 그를 신뢰하는 사람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이다. 시편 제 16편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하나로서, 계시의 하나님 아웨를 철저히 의뢰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는데도 그 하나님을 마다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시인은 야웨 하나님만이 행복과 축복과 보호의 근원인 것을 믿고 그에게 피난한 사람이었다. 그 얼마나 슬기로운 사람인가! 그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피난했더니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영은 즐거워하고, 나의 몸도 안전하게 쉬나이다”라고 고백했다(9절). 이것은 그의 신앙 간증이다.
그 하나님의 안전한 품에 안길 때, 하나님은 “삶의 길을 보여 주시며, 그 어전에서 충만한 기쁨을 가지게 하시며, 그의 옳은 손으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신다”고 고백한다(11절).
인생이 고해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품으로 피난한 사람은 고해를 무난히 건널 수 있다. 풍랑에 휩싸인 제자들의 배에 예수가 오르시자, 바다와 바람은 잔잔해졌고, 배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하나님 안에 피난한 사람에게는 인생이 절망적인 고해가 아니고, 기쁨과 안전과 승리의 도장이 된다.
나를 눈알처럼 보호 하옵소서
시편 17편
시편 17편 저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빌면서 두 가지 은유(隱喩)를 사용하고 있다. 자신을 눈알과 병아리로 비유했다(17:8). 눈알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극히 소중한 것이지만, 매우 섬세하면서도 연약한 물체이다. 그래서 유해한 것을 막고 보호하는 눈가풀이 장치되어 있고, 유선(流線)에서 눈물을 내어 이물질은 씻어 내기도 한다. 새들의 병아리는 엄지 새가 그들의 날개로 보하고 품어주고 보호해 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 시인은 자기의 연약함을 눈알과 병아리로 비유한 것이다. 우선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깨닫는 것이 현명하고 또 필요하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물이 가득하며, 죽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혼신의 노력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보면 조물주 하나님께서 본능적으로 눈가풀이 움직여서 눈알을 보호하도록 하셨다. 무력한 병아리를 엄지 새들이 본능적으로 보호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새들이 생존한다.
그런데 인간은 교만해서 자가가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 재간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래야 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인간은 눈알처럼 아주 유약한 존재이며, 병아리처럼 허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눈알을 보호하는 눈가풀이 필요하듯 보호자가 필요하다. 병아리가 엄지 새들의 날개가 필요하듯, 보호의 날개가 필요한 것이다.
시인은 야웨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눈가풀 같은 보호자이시며, 엄지 새의 날개처럼 튼튼하고 포근하고 안전한 보호자이심을 깨닫고 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보호를 빌면서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자신의 결백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리이신 분이시기에, 그와 code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지막지 무법한 분이거나 힘만 쓰시는 분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닮은 인간을 원하시는 분이시기에,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스스로 도말할 길이 없지만,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의 피를 가지고 나오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을 내리기로 약속하셨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간은 어쨌든 의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와야 하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보호를 빌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우리는 이 시인처럼 결백한 자로서 하나님께 나와야 하며, 그 상태에서의 기원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인 주변에 많은 원수가 있고, 겹겹으로 박해가 에워싸고 있었고, 우는 사자처럼 자기를 삼키려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원수들을 물리쳐주실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했다. 그런 확신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받드는 임금
시편 18장
성경의 시편에는 소위 제왕시(帝王詩= Royal Psalm)가 아홉 편이 있다(2,18,20,21,45,72,89,110, 132). 제 18 장이 그 중의 하나이며, 그것이 시편 중에서 세 번째로 긴 시이며, 제왕시 중에서는 제일 긴 것이다. 동양에서는 왕을 천자(天子)라고까지 부르며,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 여기고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는 왕을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나라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으며, 통치의 수단으로 혹은 권력을 최대한으로 휘두르기 위해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망발을 하기도 했으며, 또 지금도 그런 예들이 있다. 그런데 시편 18장을 쓴 이스라엘의 왕은 참으로 이상적이며 모범적인 왕이었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의 군주 국가에서는 임금이라면 못 할 일이 없는 최고 권력자로서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왕(다윗)은 야웨 하나님을 철저히 받들고, 그의 수하에 있는 존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왕이었다.
인간적으로는 자기가 그의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너무도 하찮은 것이며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지금 승리자로서 하나님 앞에 이 찬미의 시를 쓰고 있지만,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야웨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와 간섭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것이었다. “죽음의 사슬들이 나를 둘러쌌고, 파멸의 분류(奔流)가 나를 공격했고, 스올의 사슬들이 나를 얽어매었고, 죽음의 올무가 내 앞에 놓였다”(18:4-5)는 것이 그가 경험한 역경의 모습이다.
아무리 임금이지만 그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나 재간이나 꾀로써는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는데, 지금 승리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야웨 하나님의 덕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 하며 찬미를 부르는 것이다.
세상의 임금들이 어디 그런가?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과장하고, 없는 것까지 붙여서 자기를 높이는 것이 세상 통치자들의 작태인데, 다윗은 진실을 알고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자기가 제왕이지만, 하나님만이 참으로 왕이시며 찬양을 받아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성군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힘. . .나의 반석. . .나의 요새. . .나의 구출자. . .나의 하나님. . .나의 피난의 바위. . .나의 방패. . .나의 구원의 뿔. . .나의 보루(堡壘)”(18:1-2)로 믿고 그를 의지하고 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았기에 그에게 승리가 온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일에 열중하였다는 것을 말함으로써(18:20-24), 하나님 앞에서나 백성들 앞에서 떳떳한 자였다는 것을 밝혔다. 오늘의 통치자들이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다윗처럼 결백을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의 통치자들이 너무도 많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를 하고 있는 현실에 비할 때, 다윗은 참으로 모범적이고 축복받을만한 성군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모든 통치자들의 사표가 될 만한 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창조와 율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시편 19장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을 어디서 발견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시편 19장 저자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물과 그의 율법에서 그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저 무한한 하늘과 땅과 하늘의 해와 무수한 별을 바라보면서, 어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찬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
1000 억 x 1000 억 개나 된다고 하는 그 많은 별들을 담고 있는 저 광활한 궁창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솜씨와 지혜를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19:1-2). 태양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얼어 죽을 터인데, 그 어마어마한 물체를 하늘에 달아놓으시고 규칙적으로 빛과 열을 내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생존케 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로우시고,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을 보면서 창조자의 능력과 지혜를 깨닫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다음은 시인이 야웨 하나님의 율법을 감탄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주먹구구로 마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한 법칙 곧 자연법칙 속에 두셨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법의 하나님이시다. 자연과학자들이 하나님이 베풀어놓으신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즉 학문적으로는 그 법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 불변하는 법칙 속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자연법칙을 내신 하나님의 지혜를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 윤리적, 종교적 법도 안에 있게 하셨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래 하나님과 그의 법도를 몰라보고 무시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법도를 계시해 주시기 시작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사실이다. “야웨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며, 야웨의 율례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며, 야웨의 법도는 올바른 것이어서 마음을 즐겁게 해 주며, 야웨의 계명은 명료하여. 눈을 밝혀준다”(19:7-8)는 것이 그 시인의 신념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정금보다 더 귀한 것이고 꿀 송이보다 더 단 것으로 사모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19:10).
하나님께서 인간이 들어 살 수 있는 자연계를 주신 것처럼, 인간이 행해야 할 길과 법도를 주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도 감탄을 하지 못하고, 율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는 둔한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자연과 율법(자연법칙과 성경에 기록된 윤리적 종교적 법칙)을 정금보다, 꿀 송이보다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에게 행복이 있는 것이다.
임금을 위한 기원
시편 20:1-9
우리들 한국 사람은 수 천 년을 외국의 침략과 점령과 지배 아래서 살았고, 통일 국가와 민족으로서 산 날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들은 매우 개인주의 적이고, 자기와 자기 가정의 안녕과 평안에만 마음을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공맹(孔孟)의 정신이 충효(忠孝)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서, 선비들이 그것을 가르쳐 왔지만 우리는 별로 충(忠)도 효(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위로 절대자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통치하는 임금을 충성스럽게 받들면서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임금과 백성이 혼연일치하여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물심양면에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지만, 인간의 제한된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보호와 도우심에 의탁하고 그의 축복 속에서 사는 일다.
시편 20편 저자는 위에서 말한 이상을 추구한 사람으로 보인다. 야웨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고, 위로 왕을 모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임금도 백성도 연약한 존재이기에, 오직 절대자 하나님께 보호와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환난의 날에 야웨여 임금님(당신)의 요청을 들어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시여 임금님(당신)을 보호해 주소서/야웨께서 성소로부터 임금님(당신)께 도움을 보내 주소서/ 시온으로부터 임금님(당신)께 지원군을 보내주시옵소서/ 임금님(당신)의 제물을 기억하시고/ 임금님(당신)의 번제를 어여삐 보아 주소서/ 야웨께서 임금님(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임금님(당신)의 계획을 이루어주소서/임금님(당신)이 승리하심으로 우리가 기쁨으로 소리 지르게 하시고/ 깃발을 날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게 하소서/ 야웨여, 임금님의 탄원들을 이루어주옵소서” 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이며 충정어린 기도인가!
우리가 과연 우리 나라의 통치자를 위하여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보았는가 말이다.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의 신앙을 말한다. “나는 알고 있다”고 확언하면서, 야웨는 그가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메시아)을 도우실 것이고, 거룩한 하늘에서 임금님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옳은 손으로 승리를 안겨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세상 사람들은 군비(軍備)를 믿고 있지만, 신앙인은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들은 무너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칠전팔기 모든 역경 속에서도 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백성의 기도를 어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반듯이 그 나라, 그 임금은 승리할 것이다.
“주여!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소서”
시편 21:1-13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으로만 또는 막연하게 의식하고 살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신론자(deist)들이 말하는 대로, 창조된 우주에서 손을 떼시고, 우주 바깥에서 수수방과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는 자연계와 인간 역사 속에 적극적으로 간섭 개입하셔서 주도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지배하시고 계신다.
시편 21편 저자 곧 히브리 시인은 우선 야웨 하나님이 자기 나라와 임금을 적극적으로 돌보시는 사실을 알고, 믿고, 시를 읊었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그 왕의 원수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간파하고, 그것을 시로 읊었다.
(1) 야웨 하나님은 힘의 신이셔서, 이스라엘의 왕에게도 힘을 주시고 도움을 주셔서, 승리하고 번영하게 하셨고 따라서 큰 기쁨을 가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임금이 원하는 것, 청원하는 것을 거절하시지 않고 이루어주신다. (3) 하나님은 임금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리셨고, (4) 임금의 머리에 정금으로 만든 관을 씌우셨고, (5) 장수의 복도 내리셨고, (6) 큰 영광과 위엄과 존귀를 주셨고, (7) 하나님 어전에서 영원한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8) 야웨를 믿는 믿음을 주셨고, (9) 불변하는 사랑을 주심으로 인해서 요동하지 않고 확고한 삶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축복이 사람의 재간이나 꾀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야웨의 축복와 힘과 사랑의 소치라는 것을 믿는 시인이었다. 사실이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힘과 사랑이 아니고는 아무도 참된 축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힘이 악한 자 곧 이스라엘 왕과 백성의 원수들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믿고 또 깨닫고 있다. 광명의 세계만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것이 아니고, 암흑의 세계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힘은 임금의 원수, 임금을 미워하는 자들을 다 색출하신다. (2) 하나님은 조만간 나타나셔서 원수들을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것이다. (3) 악인의 자녀들까지 파멸하실 것이다. (4) 원수들이 임금에게 악을 획책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5) 원수들을 좇아버리시고 그들에게 화살을 쏠 것이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그러한 힘을 가지신 분으로 믿기에, 그 힘을 찬미하며 노래하겠다고 다짐한다. “야웨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당신의 능력을 노래하리이다. 찬미하리이다.” 하나님을 전능한 힘의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런 기쁜 찬미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22 장의 첫 구절이다. 그것은 또한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부르짖은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한 몸에 걸머지시고, 가장 큰 죄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순간에 그렇게 부르짖으셨다. 생명이신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바로 죽음이고, 그것이 곧 가장 큰 고통이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짖으셨다.
시편 22편 저자 시인은 인간이면서 당한 자기의 고통을 길게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는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고, 밤낮으로 목청을 높여서 부르짖었건만, 하나님은 자기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었을 때에는 그들을 구원해 주셨는데, 어째서 그들의 후손인 자기를 하나님이 외면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벌레가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고 멸시하는데도, 하나님은 구조의 손을 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덩치가 어마어마한 투우 황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으며, 굶주린 사자가 자기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으며, 뼈가 쑤시고, 마음이 녹아내리며, 목은 마르고, 죽음의 문턱에 서 있고, 나의 남은 옷가지마저 원수들이 나누어가지려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을 가지고 사방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도울 자, 구원할 자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11절). 아무리 들러보아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존재의 근원은 야웨 하나님이시고, 돌아갈 곳도 하나님 의지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밝히 알 도리는 없지만, 피난처는, 도움을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혹은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고통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돕고 구원하신 분이 안 계시기에, 그에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그런 확신을 가진 이 시인은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찬미하는 시를 읊는다. 결국 그의 간구가 응답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환난에서 구출하셨다.
자기는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이 시인의 경험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그를 떠나가지 말고,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우리를 내신이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야웨가 나의 목자이시니. . . .”
시편 23편
다윗은 원래 베들레헴 골짜기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돌이 많고 평지가 많지 않고 물이 별로 없는 산골에서 양을 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건기(乾期)에는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에 바쁘다. 목마른 양들에게 물을 얻어 먹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험준한 살 골짜기와 야수둘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양을 보호하고 제대로 먹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윗은 목자로서 자기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번번이 느꼈을 것이다. 그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이제 신앙의 눈을 가지고 야웨 하나님을 생각할 때 너무도 대조적인 것을 느끼며 이 시를 썼다고 본다. 야웨가 자기의 목자로서 하신 일을 생각하니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찬미의 시를 쓴 것이다. 자기는 목자로서 양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는데, 자기의 목자이신 야웨는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양들을 데리고 종일 걸어가며 풀을 찾아도 양들에게 배부르게 할 도리가 없었는데, 자기의 경우에는 쏴 다닐 필요도 없이 푸른 풀밭에 누어서 새김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목동일 때에는 물을 구하지 못하거나, 우물에서 조금씩 떠다가 먹이는 정도였는데, 하나님은 잔잔한 시내, 풍부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여 마음껏 마시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체를 소성(蘇醒)케 할뿐 아니라 마음도 영혼도 상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양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해서 방황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평탄하고 옳은 길로 자기를 인도하신다.
위험에 처했을 때 속수무책 양들을 버려둘 때도 있었는데, 야웨는 언제나 자기와 같이 하시고 그의 능력의 지팡이로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구출하신다. 목장에서는 목초 때문에 목동들 사이에 싸움이 생겨서 쫓고 쫓기는 일들이 있는데, 원수에게 추격을 당하여 달아나다가 어떤 집으로 달려 들어가 보호를 청하는 경우도 있다.
다윗이 야웨께 피난을 했더니, 집 밖에서는 원수가 숨을 헐떡거리며 노려보고 있는데, 야웨는 자기를 환영하여 귀빈 취급을 하시며, 만반진찬으로 먹여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잔이 흘러넘치도록 포도주를 채워주시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그를 따를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평생 같이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야웨 하나님은 자기의 양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의 집에서 함께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야웨는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택하시고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시고, 그의 집에서 영원히 같이 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선하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